[민주주의 훼손을 행정적 착오라는 가벼운 말로 덮지 말라.] 선거는 왜 민주주의의 꽃이라 불리는가. 모든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민주주의의 기본 정신을 피워내는 장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2026년 6월 3일, 선거관리위원회는 그 꽃을 무참히 짓밟았다. “투표용지가 9장밖에 남지 않았다.” “순서대로 50명은 일단 투표하고, 그다음은 상부의 지시를 받아야 한다.” 투표소를 찾은 유권자들이 들은 말이다. 유권자들의 참정권이 언제부터 순서대로 줄을 서서 쟁취해야 하는 대상이 되었는가. 국민은 이제 투표권을 행사하기 위해 투표소 앞에 ‘오픈런’이라도 해야 하는가. 어느 투표소에 갔는지, 언제 도착했는지에 따라 누군가의 한 표는 허용되고 누군가의 한 표는 짓밟힌다면, 이를 민주주의라 부를 수 있겠는가? 참정권은 선착순으로 배분되는 권리가 아니다. 전국 50여 곳의 투표소에서 투표용지 부족이 확인되었고, 그중 22곳에서는 투표가 중단되었다. 유권자들은 투표용지가 없다는 전례 없는 이유로 참정권을 침해받았다. 누군가는 투표용지를 기다리며 기약 없이 줄을 섰고, 누군가는 투표 종료 시간을 넘겨서야 겨우 투표할 수 있었으며, 누군가는 끝내 발길을 돌려야 했다. 정치인이 권한을 행사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선거를 통해 국민으로부터 권한을 위임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투표용지 부족’이라는 황당무계한 사건으로 인해 일부 국민의 의사는 배제되었다. 흠결 있는 절차 위에서 치러진 선거는 민주주의를 꽃피울 수 없으며, 권력 행사의 정당성은 뿌리부터 흔들린다. 선거관리위원회의 안일한 대응은 비단 이번 지방선거의 정당성에만 문제를 가져온 것이 아니다. 정치 체계에 대한 국민적 불신을 낳았다. 이 불신을 악용한 각종 기회주의적 행태와 분열을 야기한 책임 역시 가볍지 않다. 선거관리위원회는 민주주의를 훼손한 엄중한 책임 앞에서 행정적 착오라는 가벼운 말 뒤에 숨지 말라. 당락에 영향을 주지 않았으니 괜찮다고 말하고 싶은가? 모든 국민이 주권을 행사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은 민주주의의 기본 가치이다. 이 당연한 원칙이 무너진 지금, 우리는 침묵할 수 없다. ‘악칠반’이라는 이름은 가벼이 얻은 이름이 아니다. 사회학과 학우들은 시대의 불의 앞에서 침묵하지 않았고, ‘사회악’이라 불릴 만큼 광장의 최전선에서 정의와 민주주의를 외쳐 왔다. 4·18 민주항쟁과 수많은 시민의 저항으로 피 흘려 지켜낸 민주주의의 가치가 훼손된 지금, 침묵은 불의에 대한 방관이자 민주주의에 대한 배반이다. 이에 우리는 다음과 같이 요구한다. 하나, 선거관리위원회는 투표용지 산정 기준, 부족 발생 규모, 투표 지연 현황, 투표 포기 사례 등 관련 자료를 국민 앞에 투명하게 공개하라. 하나, 이번 사태를 선거관리위원회의 자체 조사에만 맡길 수 없다. 국회는 국정조사를 통해 투표용지 부족 사태의 전말을 철저히 규명하라. 하나, 선거관리위원회는 임기 만료를 앞둔 위원장의 사임을 책임 이행으로 포장하지 말라. 투표용지 부족 사태에 관여한 모든 책임자를 문책하고, 국민의 참정권을 훼손한 데 대해 공식 사죄하라. 하나, 선거관리위원회는 국민의 참정권이 다시는 행정적 안일함으로 침해되지 않도록 투표용지 인쇄·배분·비상 보충 체계 전반에 대한 구체적인 재발 방지 대책을 마련하라. 민족의 이름을 짊어진 고려대학교, 민중의 저항을 상징하는 동학농민운동의 이름을 이어받은 녹두문대, 그리고 불의에 맞서 기꺼이 ‘사회惡’이 되겠다는 신념을 이어받은 해방악칠 구성원으로서, 우리는 또다시, 기꺼이 ‘사회惡’이 되리라. 2026년 6월 6일 고려대학교 사회학과/악칠반 제40대 학생회 집행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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